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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여행은 언제부턴가 ‘기록’ 중심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 SNS에 올릴만한 장면을 위한 연출, ‘여기 다녀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필수 장비처럼 되어버린 카메라.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렇게 기록된 여행을 얼마나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요? 이번 여행은 과감히 카메라를 내려놓고, 눈과 마음으로만 풍경과 감정을 담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사진 한 장 없이 다녀온 여행에서 오히려 더 깊고 오래 남은 감정의 기록입니다.
감정에 집중한 여행 – ‘기록’이 사라지니 보이는 것들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가방에 챙기던 것이 바로 카메라였습니다. 비싼 장비는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의 고화질 카메라로도 웬만한 풍경은 충분히 담을 수 있기에, 항상 촬영은 여행의 중심에 있었죠.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걸 직접 경험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장면을 수집하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여행이 풍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콘텐츠를 모으는 작업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카메라를 챙기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찍지 않겠다는 결심은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시작이었죠. 여행 첫날, 유명한 해안가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이걸 안 찍고 지나가도 괜찮을까?’ 하지만 곧 그 질문은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렌즈 너머가 아닌 맨눈으로 바라본 풍경은 더 생생했고, 거센 바람의 냄새와 파도 소리는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카메라를 들지 않자, 평소엔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던 마당, 낡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노부부, 벽돌 사이로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 이런 장면들은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지만, 감정으로는 누구보다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기억은 사진보다 훨씬 오래가더군요. 우리는 결국,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마음에 남는 것들을 더 오래 간직하는 존재니까요. 또한 그날 느꼈던 감정 하나하나가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작은 카페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마신 커피 한 모금, 현지인의 따뜻한 환대, 미소로 건넨 한 마디 인사. 이 모든 것이 카메라가 없었기에 더욱 진하게 스며들었습니다. 이 순간들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닌 '온전히 경험하기 위한 것'으로 바꾼 여행. 그것은 분명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습니다.
피사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하다
여행 사진 속 내 모습은 언제나 비슷했습니다.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미소 짓고, 누군가 찍어주는 구도 안에 서 있는 익숙한 포즈. 카메라 앞에서의 나는 늘 연출된 '타인에게 보여주는 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내가 여행에서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는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피사체가 아닌, 여행의 ‘주체’가 되기로 했습니다. 카메라가 없으니 나를 보여줄 이유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습니다. 마치 세상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런 불안은 점점 사라지고, 여행의 주체로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오후, 시끌벅적한 명소를 지나 도심 외곽의 작은 서점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현지 작가의 에세이를 발견했고, 소파에 앉아 한 시간 넘게 그 책을 읽었습니다. 누구도 나를 찍지 않았고, 어디에도 공유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오히려 어떤 인증샷보다 깊고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를 위한 여행, 타인을 위한 장면이 아닌 진짜 내 취향과 감성을 위한 선택. 그게 바로 이번 여행의 진짜 핵심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여행 후에도 일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진이 없기에 오히려 더 자주 그 여행을 떠올렸고,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연습이 시작되었죠. 일상을 살아가며도 이제는 조금 더 나에게 솔직해졌습니다. 피사체로서 꾸며낸 내가 아닌, 진짜 주체로서의 나를 만날 수 있었던 여행.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기억으로 남은 풍경 – 더 오래, 더 따뜻하게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사진첩을 열지 않아도 머릿속엔 수많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따로 저장하지 않아도, 오히려 더 오래 남은 풍경들. 그리고 그 풍경은 단지 시각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의 공기 냄새, 먼지 날리던 골목길, 해질녘의 붉은 햇살, 그리고 내 마음의 울림까지 모두가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진으로 남겨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말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저는 그 반대의 경험을 했습니다. 사진은 순간을 프레임 안에 가두지만, 기억은 시간과 감정을 함께 저장합니다. 그날의 햇살, 바람 소리, 냄새, 그리고 감정까지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각인되어 있기에, 더 생생하고 오래 남는 것이죠. 무엇보다 감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은 매번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지치고 힘든 날이면 그 여행을 떠올립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장, 조용히 흐르던 강물, 벤치에 앉아 있었던 노부부, 가만히 바라보던 저녁하늘. 사진은 없지만, 그 순간들은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오히려 더 생생한 기억이 남았던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앞으로도 제 삶을 따뜻하게 채워줄 거라 믿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지만, 그 감정은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감정을 기억하는 존재니까요.
카메라를 내려놓고 떠난 이번 여행은, 기억을 오롯이 감정으로 남기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기록을 위한 여행이 아닌, ‘나’를 위한 여행이 얼마나 진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직접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도 다음 여행에서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마음으로 풍경을 담아보세요. 사진보다 더 오래, 더 따뜻하게 남을 것입니다.